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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다시 듣는 성불사의 밤

등록일 2021년06월18일 16시53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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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사의 밤은 아마 1980년경 이전에 태어난 한국인들에게는 친숙한 가곡일 것이다. 노산 이은상 시조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작품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던 노래인데 요즘에는 거의 들리지 않고 산사음악회 선곡 정도로 간간이 불리는 것 같다.

 

20대 후반인 필자의 자식들도 이 노래를 모르는 것을 보면 시대가 많이 변했음을 알겠다. 이 시조는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노산이 29세 때 현재 북한의 함경북도 사리원시 정방산에 있는 성불사를 찾아 유숙한 후 지었고 1932년 홍난파가 곡을 붙여 다음 해에 세상에 내놓았다니 참으로 오래된 가곡이다.

 

필자는 작년에 우연히 BTN 불교방송에서 이 노래를 수십 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는데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먼지 쌓인 채 있던 멜로디와 노랫말이 새롭게 살아났다.

 

예전에는 노랫말 속에 든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에 그저 끌렸었는데 긴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들으며 노산의 시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살펴보게 되었다. 또 유튜브에서 여러 성악가들이 부른 이 노래를 들어보고 이 가곡이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에 대해 사유해 보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물론 홍난파의 곡과 노산의 시조가 만나 만든 시너지 효과이겠지만 필자는 노산의 시조 역할이 크지 않나 생각한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댕그렁 울릴제면 또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일젠 또 들리라 소리나기 기다려서
새도록 풍경소리 데리고 잠못이뤄 하노라.

 

이 시조를 단순히 나그네의 여수와 고독을 읊은 것으로 읽으면 노산의 시세계의 진가를 놓치게 된다. 노산은 이 시조에서 인간존재의 근원적 괴로움을 여의고 영원한 행복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암시하며 아울러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노래하고 있다. 성불사란 제목 자체가 그런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발원을 담고 있다.

 

■ 보리와 번뇌의 이중주
 
이 시는 두 개의 시조가 이어진 연시조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전편은 적멸과 깨달음의 오계(悟界)를 후편은 번뇌에 물든 미혹한 세계 즉 미계(迷界)를 노래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보리(菩提)와 번뇌, 승과 속을 읊고 있다.

 

등장인물은 주승과 객(손) 두 명인데 여기에 보이지 않는 시적 화자가 있다. 작가 노산은 시적 자아이면서 전지적 작가 시점의 화자인 관찰자이기도 하다. 이 화자가 승과 객을 내려다보는 삼각구조 속에 시가 전개되는데 이는 작가 노산이 성불사에서 유숙한 실제 경험에 기인한 듯하다. 시 속에서 등장인물의 대비는 그들이 속한 정신세계의 대비로 연결된다. 전편에서는 색(色)과 공(空)이 원융한 진공묘유의 중도세계가 부각되고 후편에서는 번뇌미혹의 중생세간이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노산이 시의 배경으로 밤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밤은 만물이 잠드는 시간으로 인간의 헐떡이는 식심(識心)과 번뇌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쉬는 시간이다. 동시에 밤은 지혜광명이 없는 무명(無明)과 어리석음의 시간이다.

 

시적 화자가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고 주문하지만 객은 번뇌 속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인다. 아울러 주승이 잠든 이 밤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사바세계의 삼독심(三毒心)과 번뇌의 불길이 꺼진 피안의 세계이기도 하다.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는 니르바나(nirvana)를 추구하는 출가 수행자와 치성한 삼독심에 허우적거리는 중생의 살림살이를 병치한 구절이다. 노산이 시의 시간적 배경으로 밤 시간을 택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적절해 보인다.

 

풍경소리도 손바닥의 양면과 같이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중의(重意)의 매개체로 작용한다. 출가사문에게는 미망을 깨우는 각성의 소리이자 깊은 밤 산사의 적적요요(寂寂寥寥)한 본래 자리에 만법이 나투는 도리를 보인다. 그러나 생멸과 진여,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닌 이치를 알 길 없는 중생에게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망상과 사량분별을 부추기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그네는 전전반측 불면의 밤을 뒤척이며 '새도록 풍경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고 탄식한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경계에 아랑곳하지 않는 주승은 무심경지에서 잠들어 있다. 한 소식 한 수행자에겐 풍경소리도 무정설법(無情說法)이겠지만 번뇌가 들끓는 나그네에겐 저자거리를 흔드는 각설이의 꽹과리 소리처럼 안면을 방해하는 소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는 차안과 피안의 교차로라 할 수 있겠다.

 


 

 

■ 피안을 향한 초월의 시선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는 노산의 시적 묘용(妙用)과 효과가 돋보이는 이 시조의 백미(白眉)이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회심의 일착자(一著子, 한 수)라 할 수 있는데 이 시조 전체의 성패(成敗)가 여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구절은 마치 산사의 저녁 예불 때 치는 범종소리처럼 독자의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기며 피안을 향한 초월의 시선을 보여준다.

 

불가에서 말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이 번뇌의 차안에서 보리의 피안으로 나아갈 것을 권유한다. 삼독심에 물든 중생의 마음을 잠시 가라앉혀 적멸의 세계로 들라고 초대한다. 번뇌에서 보리, 예토에서 정토, 차안에서 피안, 중생에서 부처로 나아가는 초대장같이... 번뇌를 쉬고 반야의 배에 오르면 도달할 수 있는 피안의 세계가 저기 있다고 노산은 조용히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마음은 바람과 파도가 쉼 없이 치는 바다와 같다. 인간의 가장 심층에 자리한 무의식인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일찰나에 9백 생멸을 거듭한다고 한다. 마음은 나뭇가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원숭이요 생각은 쉼 없이 달리는 말에 비유된다. 심원의마(心猿意馬)라는 말이 그것이다.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는 날뛰는 말을 말목에 묶고 술 취한 원숭이를 우리에 가두라는 노산의 당부처럼 보인다.

 

쉬운 언어로 구성된 간결한 일구가 당기는 힘은 고요하면서도 강력하다. 이 구절은 중생계의 나그네를 불계(佛界)로 이끄는 알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어서 비록 중생의 근기로는 그 부사의(不思議)한 지향처를 알 길이 없으나 풍부한 시적 소구력을 획득하고 있다.

 

정각세계는 말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작용이 소멸된 곳 즉,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멸처(心行滅處)라고 한다. 또 진여불성은 한 티끌도 붙을 수 없는 자리라 한다. 그 자리는 언어와 생각으로 알고자 하면 빗나가기에 그저 가리킬 수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는 일구는 시적인 기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 고해의 밤에 던지는 등대 불빛

 

성불사의 밤은 노산의 불교적 안목을 보여주는 노래인데 산사를 읊은 그의 다른 시조 '장안사'에서 보이는 범상한 무상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경지를 보여준다. 노산은 성불사의 밤에서 번뇌에 괴로워하는 사바세계 중생에게 괴로움이 끊어진 영원한 안락의 세계와 그곳으로 나아가는 길을 넌지시 암시한다. 풍파 거센 밤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다 육지에서 날아온 한 줄기 등대 불빛을 발견한다면 어떨까.

 

성불사의 밤은 괴로움의 바다에서 안락의 섬을 찾는 이들에게 하나의 등대가 될 수 있다. 생사 일대사와 존재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종교적 해답을 모색하건 사회적 자아로서 겪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남을 구하건 그건 부차적인 문제이다. 

 

일제강점의 역사적 암흑기와 전쟁과 고난, 궁핍과 시련의 시대를 헤쳐 온 겨레에게는 잠시의 안면과 휴식, 마음의 평화라도 얼마나 소중했을까. 성불사의 밤이 오랜 세월 애창가곡으로 남은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도 영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 존재의 본원적 진실

 

성불사의 밤만큼 한 곡의 노래를 다층적으로 향유하게 하는 작품도 드물 것 같다. 짧은 노래 한 곡조가 독자로 하여금 문학적 사유, 예술적 감성, 종교적 명상에 동시에 젖어들게 만든다. 문학, 예술, 종교가 어우러진 이 세계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귀의처를 이따금 울리는 '그윽한 풍경소리'로 일깨워 준다.

 

고해의 중생세간에서 가끔 정신적 위안과 고요가 필요할 때 또 번뇌 속에서 감로수 같은 정화를 찾을 때 어쩌면 성불사의 밤에서 제법실상(諸法實相) 그 본원적 진실의 문과 대면할 수 있겠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어도.[김혁동 KBS 전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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