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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나눔과 실천의 경주최부자②

등록일 2021년11월26일 13시27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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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업적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족산업에 헌신한 시기이고, 둘째는 해방 이후 전 재산을 민족교육에 쾌척하여 헌신한 시기이다. 

 

최준의 민족의식은 부친 최현식에게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최현식은 구한말 의병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00년 경주 교동을 방문했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1906년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하였고, 1903년 경주 교동을 방문했던 신돌석은 1906년 3월 영해(寧海)에서 창의하였다.

 

그리고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1906년 음력 5월 5일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이강년, 여중룡 등과 회합하여 전국적인 창의를 계획하였다.

 

이에 최현식은 1905년 최익현의 청양의병과 신돌석의 영해의병에 이어, 박경종(朴慶鍾, 영해), 이상룡(李相龍, 안동), 차성충(車晟忠, 거창), 이규홍(李圭洪, 예천)이 연합한 가야산의병을 지원하고, 다음에는 허위의 임진강의병을 지원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무명의 의병 부대를 지원하였으며, 1907년에는 급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민족적 대의에 따른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여 국난 극복에 기여한 사실이 최근 발견된 문서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부친 최현식의 민족정신을 지켜보며 배운 최준은 일찍이 젊은 나이에 부친으로부터 집안의 모든 가사를 물려받았다. 때는 바야흐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위로는 일본의 국권 침탈이 한층 노골화되고 있었고, 아래로는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한민족의 반일운동이 들불처럼 거세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 무렵 최준과 인연을 맺고 있던 주변 인물들은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을 통해 현실의 국난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에 최준은 부친 최현식을 보좌하며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한편 1908년 3월에 설립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가입과 1908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 경주지회(慶州支會)의 설립을 통해 계몽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교남교육회는 창립 때부터 최준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이 모임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기간 동안에는 서울에 체류하며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예컨대 박상진?김응섭 등과 함께 활동하였고, 안희제(安熙濟),서상일(徐相日), 남형우 등의 계몽적 인사를 만났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은 최준의 사촌 매형이다.

 

그가 양정의숙에서 수학할 때 안희제는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서 양정의숙으로 전학하여 졸업하였고, 서상일은 1907년 보성법률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최준은 일찍이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계몽운동에 눈을 뜰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최준은 숙부 최현교(崔鉉敎)와 함께 대한협회 경주지회를 설립하여 간사원(幹事員)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준은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 활동을 통해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는 계몽운동의 목표인 경제적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많은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을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권 회복을 위한 신교육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경주에 월성여학교(지금의 월성초등학교)를 설립하여 학교 운영 경비를 부담하였다. 이때 계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인맥은 향후 일제하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동지로 발전하는 토양이 되었다.

 

191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은 비밀결사 단체의 활동에 의해 전개되었다. 박상진,서상일,안희제는 국권이 강탈된 이후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중국 상해 등을 여러 차례 여행하였다. 이들은 해외 독립운동과 중국 신해혁명의 상황을 둘러보고는 국내 독립운동 방향과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최준은 이들과 국권 회복을 위해 뜻을 함께하였고, 이들이 주도하였던 대동청년단,조선국권회복단?대한광복회 등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해 활동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먼저 국내에서의 세력를 확장하고,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며, 최후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 단체는 1919년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만주의 독립군 양성, 그리고 영남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 등을 지원하였다. 이때 최준을 비롯한 배상연(裵相淵),서상환(徐相?),서상호(徐相灝) 등 각 지역의 지주 및 부호들이 해외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였다. 

 

한편 최준은 처삼촌인 김응섭이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남형우와 함께 상해로 출발할 때도 많은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 무렵 백산무역(주)의 윤현진과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안확(安廓)이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서상일도 상해로 탈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최준은 대동청년단 단원인 아우 최완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재무위원,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게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최완은 모진 고문과 감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36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당시 일본 경찰은 최완이 현금 2만원을 가지고 상해 임시정부에 왔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임시정부 1년 예산의 30%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와 같이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다. 

 

1920년 대한광복회 사건으로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5명이 사형을 언도받아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최준 자신도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박상진의 구명을 도울 목적으로 박상진의 사돈인 청도의 이정희와 함께 도평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그는 곧 그것이 일제의 위장 정책임을 파악하고 관계를 끊음으로써 정도(正道)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후 식산은행장 아리가 미쓰도요(有賀光豊)를 통한 조선총독부의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 제의도 거절함으로써 일제의 회유에 꿋꿋이 저항하였으나, 그 대신 아우 최윤(崔潤)이 경상북도 도의원을 거쳐 중추원 참의로 식민통치의 하부기구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최준은 아우 최윤(崔潤),최완(崔浣),최순(崔淳)과 더불어 식산흥업(殖産興業)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07년 10월 아우 최윤이 설립한 경주금융조합(慶州金融組合)과 1908년 최준 자신이 중역으로 참여한 경주흥업(慶州興業)은 이 집안이 처음 시작한 근대적 기업이었다.

 

최준은 경주흥업의 중역이 된 이후, 합자회사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주주를 거쳐, 주식회사 백산무역(白山貿易)의 취체역 겸 사장으로 민족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계림무역(鷄林貿易),대동무역(大東貿易)?경북산업(慶北産業)?고려요업(高麗窯業),경주상회(慶州商會),경주산업조합(慶州産業組合) 등의 회사를 직접 설립하거나 회사의 유력한 주주로 참여하였으며, 경남은행(慶南銀行),대구은행(大邱銀行),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경일은행(慶一銀行),해동은행(海東銀行)의 이사 및 대주주를 역임하였다.


 

 

                   

백산상회는 1914년 중국에서 귀국한 안희제가 1916년 독립운동의 정보 연락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한 소규모의 개인상회로 시작하여 자본금 14만원의 합자회사로 전환하였다. 그후 1919년 자본금 100만원의 백산무역(주)으로 확대 전환하였다.

 

이때 최준은 백산무역(주)의 대주주로서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아우 최완과 최순은 이사로서 그를 보좌하였다. 최완은 합자회사로 전환된 이후부터 1919년까지 이사를 역임하다가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재무부 위원으로 망명하였고, 최순은 백산무역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였다.

 

최준은 백산무역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자본을 출자한 실질적인 경영인이었고, 나아가 안희제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동지였다. 최준은 1919년부터 백산무역(주)을 통해 대지주 등 유력자를 연결하는 상업조직을 통해 방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여 송달하였다.

 

이때 최준은 항상 장부상 거래의 형식을 취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송달함으로써 일경의 수사를 피할 수 있었다. 백산무역을 통해 해외로 송금된 독립운동 자금은 100만원이 넘는 거액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21년 백산무역(주)은 자금난으로 경영 위기에 봉착하였다.

 

사장 최준은 300년 대대로 물려받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맡기고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회사 경영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대부분의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냄으로써 백산무역과 함께 파산에 이르게 된다. 

 

그 밖에 최준은 1918년 9월 대동단 의거와 1919년 9월 강우규 의거에 연루되었으며, 1921년 9월 태평양회의에 이승만 등이 진정서를 제출할 때 경주군 대표로 서명하였다.(최창호 경주최부자선양회 이사)

(투데이포커스 ⓒ www.todayf.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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