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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나눔과 실천의 경주최부자①

등록일 2021년11월25일 11시19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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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씨는 통일신라 말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 대세(大勢)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 각처에 흩어져 살면서 많은 문중을 형성하였으며, 수많은 명인 명사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중 하나인 경주 교촌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최부잣집은 세거(世居) 300년에 불과하나, 그동안 10명의 진사를 배출하고 12대에 걸친 만석꾼 집안으로 유명하다.

 

문중의 현조(顯祖)로서는 조선 초기에 성균관 사성(司成)을 역임한 청백리 최예(崔汭)가 있고,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진립(崔震立)이 있다.

 

최진립은 의병을 일으켜 경주에서 왜병을 물리친 후에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직을 맡았다. 이후  정유재란에서는 무관으로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병을 무찌르고, 1636년 병자호란을 만나서는 충청감영(忠淸監營)의 영장(營將)을 맡아 남한산성으로 나아가 싸우다가 용인군(龍仁郡) 험천(險川)에서 전사하였다. 그때가 69세였으니, 나라에서는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리고 청백리에 추증하였다.

 

정무공 최진립은 국가에 의해 추증된 데 이어 민중에 의한 추향도 뒤따랐다. 순국 50년인 숙종 12년(1686)에 함경도 경원 백성들이 한때 경원부사를 맡아 국경에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해서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추향했으며, 경주에서는 사액사당으로 용산(龍山)에 숭열사(崇烈祠)를 세워 추향했는데, 이 숭열사는 개원과 함께 용산서원(龍山書院)으로 승격하였다. 정무공은 슬하에 동윤(東尹, 1591) 동설(東說, 1596) 동량(東亮, 1598) 동길(東吉, 1601, 백부 출계) 동경(東璟, 1604) 동우(東?, 1612)의 6남과 1녀를 두어 머지않아 대문중을 이룰 것을 예고했다.

 

정무공 집안이 대문중을 이룰 것을 예고했다는 말은 단순히 후손이 많아서가 아니라, 누대에 걸쳐 10명의 진사를 배출한 사실에서 보듯 도학에 공헌한 인물이 많다는 뜻이다. 우선 문중의 현조로서 조선 초기 사성공(司成公)과 중기의 정무공(貞武公)부터 모두 청백리의 명예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집안처럼 후손이 많다거나 벼슬아치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청백리 전통을 자랑하는 깨끗한 인물이 많다는 뜻이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무공 최진립을 비롯하여 대대손손이 크게는 도덕군자의 생애를 살았으며, 작게는 흉년기에 활인당(活人堂)을 통한 구휼시설로 사회복지의 생애를 살아서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 때문에 명화적(明火賊)이나 활빈당(活貧黨) 같은 도적들의 반란을 당하여서도 그들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은 사실은 유명하다. 명화적이 경주를 습격했을 때 최부잣집과 관련 있는 사람이나 재물에는 손대지 않았으며, 활빈당의 지도자 격인 신돌석(申乭石)도 활빈당 초창기에 최부잣집에 장기간 투숙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긴 바 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특히 정무공 11세손인 둔차(鈍次) 최현식(崔鉉軾, 1854~1928)과 12세손인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1970)의 족적이 뚜렷하다. 효심이 지극하여 성인이 되어서도 색동옷을 입고 부모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둔차 최현식은 구한말 많은 의병들을 지원하고 근대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문파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 광복회 활동과 임시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공헌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살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희사하여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경주 교촌의 옛집도 대구대학의 후신인 영남대학교 소유가 되어 있다. 이것이 12대 만석꾼 집안의 현실임을 생각할 때 당초 그 뜻은 마땅히 상찬할 바이지만,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누대에 걸쳐 만석꾼 집안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 가문은 부(富)의 형성과정부터가 여느 경우와 사뭇 다르다. 우선 정무공(貞武公)이 청백리로 녹선(錄選)된 사실 자체가 탐관오리가 축재한 경우와 크게 다르다. 그는 오히려 탐관오리의 수탈로부터 만석(萬石) 재산을 유지하는 데 정성을 쏟으며 살아야 했다.

 

최부자 가문 재산의 기본 바탕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얻은 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성에게 개간권(開墾權)이 있어서 백성이 주인 없는 공한지(空閑地)를 개간하면 점유권이 인정될 뿐만 아니라 3년간은 조세도 면제되었다. 이때의 개간사업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것이 최부잣집 부(富)의 내력이다.

 


 


최부잣집에서는 이렇게 형성한 농토를 남다른 경영 기법과 혁신적인 농업 기술을 통해 더욱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다. 예컨대 이 집안에서는 당대 소작료가 전국적으로 8~9할일 때 반분작(半分作)으로 소작을 주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소작료가 6할이었음을 감안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세간에서는 “최부잣집 논은 단갈림(베어놓은 볏단을 지주와 소작인이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일)한다”라는 말로 불리면서 화제와 칭찬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이앙법(移秧法, 모를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 심는 농사법)을 선구적으로 도입한 것도 최부잣집이었다.

 

이 집안에서는 경주 교촌으로 입향한 이래 이 동네에 흐르는 형산강 지류인 문천(汶川)의 수리를 이용하여 생산성을 더욱 높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근방의 농민들은 하나같이 이왕 소작을 할 거라면 최부잣집 소작농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최부잣집에서 실행한 반분작 소작 형태는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시대를 앞서가는 민본주의의 선구적 행동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이 집안의 전통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최부잣집은 조선 후기 이래 벌써부터 근대적 농업의 한 형태였던 경영형 부농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최부잣집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가훈으로 ‘육연’과 ‘육훈’, 그리고 ‘가거십훈’이란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연(六然): ①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②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③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④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⑤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⑥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육훈(六訓): ①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②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③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④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⑤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⑥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가거십훈(家居十訓): ① 명인륜(明人倫, 인륜을 밝힌다), ② 사친효(事親孝,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한다), ③ 애군충(愛君忠, 임금을 사랑함에 충성을 다한다), ④ 의실가(宜室家, 가정을 잘 다스린다), ⑤ 우형제(友兄弟, 형제 사이에는 우애가 있다), ⑥ 신붕우(信朋友,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다), ⑦ 원여색(遠女色, 여색을 멀리한다), ⑧ 계후주(戒?酒, 술에 취함을 경계한다), ⑨ 과농상(課農桑, 농업과 잠업에 힘쓴다), (10) 강경학(講經學, 경학을 익힌다)

 

이상의 가훈을 살펴보면 먼저 스스로에 대해서는 지나친 욕심을 억제하고 오만해지지 않도록 가르치며, 타인에 대해서는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하지 말고 이웃에 어려움이 생기면 도울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수신(修身)과 적선여경(積善餘慶)의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충실이 실행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부유하면서도 주변의 존경을 받기는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최부자 가문이 이 둘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가훈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집안의 민본주의적 인간 본위의 오랜 가풍이 결코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표현에 따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의 진정한 실천이라고 하겠다.

 

최부자 가문의 명성이 더욱 높아진 것은 12세손이자 이른바 ‘마지막 최부자’라고 불리는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1970)에 이르러서였다.

 

명성의 기초는 이미 정무공으로부터 비롯되어 대대로 10명의 진사를 배출하고 12대 300년에 걸쳐 만석을 유지한 빛나는 전통이 있었으나, 최준이야말로 그동안의 최부자댁 경영과 재부(財富)를 총정리하여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희사함으로써 놀랍도록 깨끗하게 결말을 마무리한 그 정신이 세상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계속] (최창호 경주최부자선양회 이사)

(투데이포커스 ⓒ www.todayf.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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